서양 문명의 뿌리를 만든 "그리스 은 광산"의 힘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 군은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그리스 군을 무찌르고, 그리스를 침공했다. 그러나 온갖 계책을 짜낸 그리스에서, 아테네의 정치가 테미스토클레스가 어떤 제안을 한다. 육지가 아닌 바다에서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후 발발 한 살라미스 해전에서 새로 제작 된 함선으로 페르시아 군을 격파했다.



그 1년 후, 페르시아 군은 아시아로 철수했다. 만약 페르시아 군이 이 전쟁에서 이겼다면, 고대 그리스와 이후의 서양 문명도 번영하지 못했을 것이다. 즉, 살라미스 해전은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싸움의 하나라고 주장하는 역사 학자도 있을 정도다.


살라미스 해전을 위해 건조 된 함선의 지불에는, 라우리온 은광에서 채굴 된 은가 사용되었다. 이 은광은 아테네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납과 아연, 구리와 은의 광맥은 오래된 퇴적물과 화산 등의 틈새에 마그마가 흘러들어 열광에 의해 형성되었다. 이 지역에서는 기원전 480~250년에 만들어진 200 가까운 채굴 광산이 고고학자에 의해 발견되고 있다. 테미스토클레스가 필요로 한 은를 산출하기 위해, 2만명의 노예가 동원 된 것으로 되어있다.



라우리온 은광에서는 300년 사이에 3000톤 정도의 순은이 산출되었다. 그리스에서 가장 큰 광산 지역으로, 채굴은 아테네의 상승에 한몫했다고 한다. 아테네는 현대의 민주주의와 서양 문명이 탄생 한 장소가 되고있다.




페르시아의 철수 후 도시 국가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패권을 놓고 장기전을 펼쳤다. 은 생산량이 감소함에 따라 아테네는 영향력을 잃고, 스파르타는 기원전 371년에 그리스의 다른 도시 국가 테베에 의해 정복된다.





한편으로 대두 된것이 그리스 북부 마케도니아이다. 기원전 310년 알렉산더 대양이 페르시아와 그리스 북부의 정벌을 성공시켜, 페르시아어류의 행정 제도를 도입했다. 알렉산더 대왕은 그 몇 년 후 사망하고 제국은 붕괴한다.


그러나 알렉산더 대왕의 업적은 이후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 생산 된 은를 사용하여 대두 된 로마 제국에 도입되었다. 로마 제국도 결국 붕괴했지만, 그 유산이 이후 서구 사회에 큰 영향을 주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