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38분 만에 끝난 사상 최단 전투 "영국-잔지바르 전쟁"이란?

인류는 유사이래, 수없이 전쟁을 겪어왔다.

그 기간의 길이는 천차만별이고, 몇 년 ~ 수십 년 만에 끝난 전쟁도 있고, 335년 동안 지속된 전쟁도 있다.(335년 전쟁 : 네덜란드와 실리 제도(영국의 남서쪽 앞바다에 있음) 사이에 1651년 ~ 1986년까지 계속된 전쟁)

그럼 반대로, 역사상 가장 짧게 끝난 전쟁은?

바로 1896년에 일어난 "영국-잔지바르 전쟁(Anglo-Zanzibar War)"이다.

개전 38분만에 끝났고, 기네스북에 "사상 최단 전쟁"으로 기록돼 있는데, 도대체 어떤 싸움이었나?

 


■ 사상 최단기의 전쟁이 일어날 떄까지

영국-잔지바르 전쟁은, 그 이름 그대로, 영국과 잔지바르 사이에 발생한 군사 충돌로, 잔지바르는 아프리카 동해안에 떠 있는 제도로, 현재는 강 건너에 있는 아프리카 본토 탄자니아의 일부로 되어있다.

1698년, 잔지바르를 점유하고 있던 포르투갈의 식민자들을 몰아내고 중동 오만의 술탄(이슬람의 군주 칭호)의 지배하에 들어섰다.

이후, 1858년 오만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당시 아프리카 식민의 선두였던 영국의 승인을 받았는데, 그후에 술탄들은 잔지바르 타운(제도 중 하나인 운구샤 섬의 서안)에 수도와 정청을 두고 해안에 궁전을 지었다.

영국은 1886년에 잔지바르 주권과 술탄의 지위를 인정하면서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 끼어든 것이 당시 힘을 더해가고 있던 독일.

독일은 동아프리카 식민에 관심을 가지고, 영국과의 교역권과 영토 지배권을 다투게 되었는데, 여러가지 다툼이 있었지만, 1890년에 영국과 독일은 동아프리카 권익 지역의 경계선을 정하는 조약을 체결(헤르고랜드=잔지바르 조약).

독일은 잔지바르에서의 권익을 영국에 양도하고, 이후 영국의 영향력이 높아지면서 잔지바르 노예거래 폐지에 목소리를 높였다.

 


■ 영국과 잔지바르의 우호 관계가 무너진 날

1893년, 잔지바르의 술탄에 친영국파 하마드 빈 스와이니가 올랐고, 하마드는 영국과의 친밀한 관계를 중시하지만, 국민 중에는 영국의 지배 확대와 귀중한 노예 거래 폐지에 반발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리고, 영국과 잔지바르 간의 우호 관계가 무너지는 사태가 벌어진다.

1896년 8월 25일에, 친영국파 하마드가 갑자기 사망한 것. 영국 당국은 곧 자국에 유리한 인물을 술탄으로 유지하려고 했는데, 반영국파 할리드 빈 바르가슈(당시 29세)가 영국의 양해를 구하지 않고 술탄 자리에 올랐다.

영국과의 조약에 따르면, 술탄의 즉위는 영국 영사가 인정한 인물이어야 했지만, 하리드는 그 약속을 완전히 무시해버린 것이다.

영국은 이를 두고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비난하며, 하리드에 대해 즉각 군을 해산하고 왕궁을 떠나라고 명령.

 


그런데 하리드는 이 통보도 무시하고 자신이 술탄임을 선언하고 2800여명의 군대를 집결시켜 왕궁에서 농성을 시작. 잔지바르 타운에 불온한 공기가 감돌기 시작했다는....

26일 오후, 모든 상선이 잔지바르 항구를 떠나고 영국인 여성과 어린이도 배를 타고 잔지바르에서 대피.

그날 밤에, 영국 영사는 이렇게 글을 남겼다.

"잔지바르를 감싸는 고요함은 끔찍했다. 항상 북치는 소리나 아기 우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날 밤엔 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그리고 드디어 일은 벌어지는데....

 


■ 개전 38분 만에 종전

1896년 8월 27일 오전 9시 2분, 항구에 집결해 있던 영국 함대는 왕궁을 향해 포격을 개시. 영국군은 순양함 3척, 포함 2척, 해병대와 수병 150명, 잔지바르인 부대 900여명.

반면 하리드가 이끄는 왕궁에는 친위대와 수백 명의 하인과 노예, 그리고 시민을 합쳐 2800여명이 있었다.

하리드 측은 여러 문의 대포와 기관총을 준비해, 영국 함대를 정조준했으나 영국군의 첫 번째 포격으로 왕궁에 불이 나 대포를 전혀 사용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바다에서는 소규모 해전도 벌어졌지만, 영국 함대의 힘은 압도적이어서 잔지바르의 왕실 요트 글래스고와 작은 배 두 척을 순식간에 수장시켜버렸다는 것.

영국군은 500여발의 포탄과 4100여발의 기관총, 1000여발의 라이플총을 쏴 잔지바르 군을 궤멸시켰다.

오전 9시 40분에 왕궁의 깃발이 떨어지고 전쟁은 종결....

불과 38분간의 일이었다.

 


■ 하리드와 잔지바르의 그 후

38분간의 싸움 속에서 영국군은 수병 1명이 부상했을 뿐이었지만, 잔지바르 측에는 약 5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대부분 왕궁을 삼킨 화재로 인한 것이었다고 한다.

영국군은 즉각 왕궁을 점령하고, 그날 오후까지 친영국파 함드 빈 무하마드를 새로운 술탄으로 올렸다.

이렇게 해서 잔지바르는 영국의 완전한 괴뢰정권이 된 것이다.

한편, 하리드는 독일 영사관으로 대피해 보호를 받았는데, 영국측에서는 하리드의 인도를 요구했으나, 독일 영사는 양국간에 체결된 범죄인 인도조약이 정치범을 제외했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

대신 하리드를 잔지바르 땅에 발을 들여놓지 않기로 합의.

결국 하리드는 독일령 동아프리카(오늘날의 탄자니아)로 이송돼 잔지바르를 떠났다.

그 후, 하리드는 1916년의 제1차 대전중에 영국군에 체포되어,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되었고, 동아프리카로 돌아가도록 허락받은 뒤, 1927년 케냐 몸바사에서 사망했다.

그가 싸운 "사상 최단 전쟁"은 주권국가로서의 잔지바르의 끝과 영국 지배하의 시초로 역사의 한 페이지에 새겨져 있다.